넷플릭스 영화 ‘페인 허슬러(Pain Hustlers)’는 단순히 실화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미국 제약 산업의 숨겨진 민낯을 생생히 드러냅니다. 영화는 한 중소 제약회사의 오피오이드 진통제 유통 과정을 중심으로, 마케팅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비윤리적 관행과 무력한 정부 규제, 그리고 이를 묵인하는 사회 전반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단지 한 개인의 부도덕한 선택을 비추는 데 그치지 않고, 시스템 자체가 얼마나 취약하고 위험한지 날카롭게 조명하는 영화입니다.
제약 마케팅의 그림자, 이윤이 우선되는 구조
영화의 주인공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제약 영업이라는 낯선 세계에 발을 들입니다. 처음에는 제품을 익히고 의사들에게 접근하는 과정이 어색하고 서툴지만, 이내 요령을 터득하며 빠르게 성과를 만들어냅니다. 그의 성공 속도는 회사의 수익 곡선과 정확히 일치하고, 결국 그는 팀을 이끄는 위치에까지 올라섭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성공이 윤리적 기준을 벗어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은 의사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제안하고, 세미나라는 명목으로 접대와 향응을 제공하며, 환자들에게는 약의 효과를 과장해서 전달합니다. 약의 부작용과 중독성은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복용량은 의사의 재량이라는 이름 아래 무제한으로 확대됩니다. 그 과정에서 회사는 막대한 이익을 얻고, 영업사원은 보너스를 챙기지만, 환자들은 약물의 효과보다는 의존에 빠져들며, 지역사회는 점점 무너져갑니다.
실제 미국 제약 산업도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리베이트는 계약이라는 이름 아래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세미나나 컨설팅의 형식을 통해 의사들을 ‘파트너’로 묶어둡니다. 광고성 자료도 마케팅이 아닌 ‘정보 제공’으로 포장되어 배포됩니다. 모든 과정은 법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결과는 도덕적 파산에 가깝습니다. 영화 <페인 허슬러>는 제약 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왜 정부는 제약 회사를 제어하지 못하는가
제약사의 탐욕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들을 감시하고 제어해야 할 정부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오피오이드 진통제는 이미 중독성과 부작용이 잘 알려진 약물이지만,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해당 약을 승인했고, 규제기관들은 제약사의 임상 결과를 충분한 검토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FDA와 제약사 간의 유착 문제는 오랫동안 제기돼온 이슈입니다. 전문가들이 제약사의 자문 역할을 하다가 다시 정부 기관으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면서, 규제기관은 점점 독립성과 신뢰를 잃어갔습니다. 약물 허가 기준은 점점 모호해졌고, 부작용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시스템은 지나치게 느리게 작동합니다. 결국 문제가 드러났을 때는 이미 수백만 명이 해당 약물을 복용한 뒤인 경우가 많습니다.
보험 시스템 역시 오피오이드 처방 확대에 기여했습니다. 제약사가 보험 등재를 확보하면, 병원과 의사는 해당 약을 우선적으로 권하게 됩니다. 환자들은 저렴한 가격에 약을 구입할 수 있고, 의료기관은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약물은 ‘치료’가 아닌 ‘상품’으로 관리되고, 의료 시스템 전반이 시장 논리에 종속됩니다. 법적 장치는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페인 허슬러>는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보다, **‘무언가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는 현실을 더욱 강조합니다. 규제는 분명 존재했지만, 기업의 속도와 전략에 뒤처졌고, 처벌은 있었지만 실질적인 억제력은 없었습니다. 법은 형식적으로 작동했지만, 현실의 부조리는 그대로 방치되었습니다.
영화는 이러한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주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이런 시스템 안에서 진짜 변화는 가능할까?
제도는 있는데 믿을 수 없고, 감시는 있는데 막지 못하는 사회. <페인 허슬러>는 그 구조적 무기력을 고발하며, 우리 모두가 마주해야 할 불편한 질문을 조용히 남깁니다.
영화가 말하는 책임의 구조, 그리고 공범들
주인공은 결국 법적 처벌을 받지만, 영화는 그 장면을 어떤 영웅의 몰락처럼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소모된 하나의 톱니바퀴에 불과합니다. 책임은 분명 개인에게 있지만, 동시에 모두가 그 책임을 나눠 지지 않으려는 사회적 분위기야말로 더 깊은 문제입니다. 회사는 실적을 강요했고, 의사는 정당한 명분을 만들어냈으며,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아무도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고, 결국 누구도 온전히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작중 인물 ‘리자(에밀리 블런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Greasing doctors is an art, not a science.”
의사를 설득하고 움직이게 만드는 일은 단순한 절차나 논리를 넘어선, 일종의 ‘감각의 영역’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대사는 허풍처럼 들리지만, 실제 제약 영업이 윤리의 경계를 얼마나 교묘하게 넘나드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제도는 있었지만, 모두가 그 틈을 비집고 빠져나가는 데 익숙했고, 시스템은 그런 편법과 타협을 끝내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현실에서도 수많은 제약사들이 오피오이드 소송에 휘말렸습니다. 수십억 달러 규모의 합의금이 오갔지만, 약물로 인한 피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기업에 대한 처벌은 이미지 회복용에 그쳤고, 핵심 경영진은 실질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무도 본질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처럼, 사태는 조용히 흘러갔고, 사람들은 하나둘 고개를 돌렸습니다.
영화 속 또 다른 인물의 짧은 한마디도 인상 깊게 남습니다.
“Pain is pain.”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이라는 이 단순한 말은, 약물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고통을 약물로 해결하려는 이 시스템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약은 언제부터 치료의 도구가 아니라, 고통을 팔기 위한 상품이 되었을까요?
<페인 허슬러>는 영화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철저히 현실입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낯익은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고, 이름만 다를 뿐 현실에서도 본 적 있는 기업 구조가 곳곳에 보입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 불편함은 등장인물의 잘못 때문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그 불편함의 진짜 원인입니다.
<페인 허슬러>는 관객에게 직접 묻지 않습니다. 대신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조용히 말합니다.
이제, 당신이 선택하라고.